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문단 편집) ===== 민간인 희생과 그 증언 ===== [[파일:왜관교 폭파시 학살.png]] >"사건개요에도 있지만 1950년 8월 3일 아침 경찰서에서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음. 낙동강 다리 양쪽 6Km이내는 8월 3일 오후 6시까지 전부 떠나도록 명령되었음. 여기는 다른 곳과 달라 격전기임. 왜관 주민들은 읍사무소로부터 피난증을 교부받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등지로 피난 가는 상태였으며 국군과 미군에 의한 희생자는 없다고 봄. 그때는 주민들이 다 떠난 상태였음. 저의 얘기를 하자면 저는 열차를 타고 갔는데 대구역에서 열차가 밀려 왜관역에서 오전 11시경에 출발 지천역에서 밤 11시에 대구역으로 떠났음. 밤 8시쯤 왜관교를 폭파했는데 폭파 소리를 저도 들었음. 그 당시 피난민 수가 많았고 소개령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에서 학살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모르는 실정임. 주민들은 알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임." >---- >▲박호만의 증언 당시 박호만은 피난을 갔기 때문에 왜관교가 폭파되는 현장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이전에 내려진 소개령 때문으로 당시 희생자들은 대부분 인근 주민이 아닌 북방에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증언을 들어보면 희생자가 다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약목에서 소개명령을 받아 낙동강변 사과밭에 있었는데 해뜰무렵에 젊은 사람이 와서 전쟁터이니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여 집으로 왔는데 마을 사람이 와서 또 다른 곳으로 가라 하여 성주 작촌리로 피난 갔음. 그 후 귀가하여 보니 폭탄은 집에 떨어져 조부는 돌아가시고 조모는 마침 밭에 나가 화를 면했다고 함" >---- >▲김진욱의 증언 이렇듯 김진욱은 집에 폭탄이 떨어진 것을 언급하며 왜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보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철교폭파 이후 미군에 의한 사격이나 폭격으로 낙동강에 종종 시체가 내려왔다고 한다. >김진석: "8월 4일 아버지가 오후 4시에 저와 동생, 그리고 소를 몰고 낙동강을 건너가는데 흰들(노석리)에서 왜관쪽으로 온은 중 1/3쯤 남겨두고 기관총으로 갈겨 제가 건너가니 미군이 '카라카라'해서 팬티만 입고 저의 아버지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손짓 발짓하니 그렇게 하라 하여 총에 맞아 죽은 아버지를 흰들 맞은편 버드나무 사이에 두고 피난 갔음. '''동생은 총맞아 그 자리에서 물에 떠내려갔음.''' 2개월정도 지나 피난갔다 돌아오면서 시신을 찾았음. 그때 총을 맞아 저 혼자만 살았음" >이상수 의원: "다른 분은 건너다 어떻게 되었는지" >김진석: '''"가끔씩 시체가 떠내려 왔음"''' >---- >▲김진석의 증언 [[파일:캐롤 키즈먼 왜관교 폭파 증언.jpg]] 왜관교 폭파당시 30여 명이 건너고 있었으며 이때 아버지가 낙동강으로 떨어 죽었다는 증언이 있으므로 희생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며, 이후 미군의 사격이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이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미군이 당시 피난민 속에 적이 잠복하여 있을 것으로 판단 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북한군들이 북쪽에서 피난민들을 사격해서 남쪽에 있던 우리 미군 부대도 피난민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대장이 말하길 우리도 부대장도 그리 믿고 있었지요 피난민들 안에 북한군 병사가 숨어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민간인들 이었습니다 그저 민간인... 북한군이 아니였습니다 전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려고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건 북한군을 사살하는 것 보다도 최악의 짓이었습니다 >---- >에트리지, 당시 미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